이로운 자동차(4) 글로브박스, 120년 전 진짜 장갑을 보관하기 위해 탄생했다.

  • 입력 2024.01.19 08:00
  • 수정 2024.01.31 13:10
  • 기자명 김흥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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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에는 안전하고 편리한 운전을 돕는 수많은 장치가 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초기 자동차에는 전조등, 실내 거울, 방향 지시등, 와이퍼처럼 지금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편의 장치를 볼 수 없었다. 그리고 한 세기를 거치면서 구동계 못지않게 안전과 편의를 위한 진화가 이어져 왔다. 자동차를 이롭게 하는 수많은 장치가 어떻게 탄생했는지 알아본다. [편집자 주]

AI 생성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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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헤럴드 김흥식 기자] 새 차를 받고 난 후 '글로브 박스(Glove Box)'에 보관된 '사용 설명서'를 펼쳐 본 이들이 얼마나 될까? 일반적인 관리에 필요한 상식부터 각종 장치의 사용법은 물론 숨겨진 기능까지 속속들이 알 수 있는 매우 유용한 참고서지만 대부분은 아주 오랜 시간 글로브 박스에 방치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왜 글로브 박스, 장갑을 보관하는 상자로 부르는 것일까? 전혀 관계가 없을 것 같지만 글로브 박스는 12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몇 안 되는 자동차 편의 사양 가운데 하나이고 또 장갑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먼저 글로브 박스는 정확한 용어가 아니다. 정확한 명칭은 칸이 나뉘어져 있거나 소품 등을 보관하는 사물함을 의미하는 글로브 컴파트먼트(glove compartment)지만 글로브 박스라고 해도 틀린 것은 아니다. 이어지는 표현은 그래서 일반적으로 쓰는 글로브 박스로 한다.

글로브 박스는 초기 자동차의 구조적인 특징때문에 탄생했다. 칼 벤츠의 ‘페이턴트 모터바겐’이 등장한 이후 20세기 초까지 자동차는 플라이휠을 수동으로 돌려 시동을 걸었다. 또 고장이 잦아 운전자는 어디서든 기름때를 묻혀 가며 정비를 해야 했다. 모두 장갑이 필요한 상황이다.

1915년 피어스-애로우(Pierce-Arrow)
1915년 피어스-애로우(Pierce-Arrow)

결정적으로 덮개가 없는 자동차를 추운 날씨에 몰기 위해서는 장갑이 필수였다. 그러나 장갑을 보관할 수 있는 마땅한 공간은 없었다. 대부분이 공구 상자 같은 작은 상자에 여러 켤레의 장갑을 보관했다.

운전이나 막일에 쓰는 장갑은 그렇게 보관하면 됐다. 하지만 여성들의 생각은 달랐다. 특히 자동차를 소유한 상류층 여성 사이에서는 고급스럽고 꽤 비싼 장갑이 유행했다. 하지만 운전을 하지 않을 때 장갑은 거추장스러운 소품이 됐다. 무겁고 두툼한 장갑이 필요한 겨울에는 더 그랬다.

최초의 글로브 박스가 언제 어느 모델에 적용됐는지는 분명치가 않다. 미국 윌리엄 패커드와 제임스 패커드 형제가 설립한 패커드사의 모델 B가 최초로 글로브 박스를 장착한 차량으로 얘기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 이전과 다르지 않게 작은 상자를 실내에 비치한 것에 불과했다.

그 때도 적지 않은 운전자들이 대시보드 아래 공간에 작은 공구나 소품 그리고 장갑을 보관할 수 있는 글로브 박스를 달고 있었다. 자동차의 엔진이 앞쪽으로 옮겨가면서 만들어진 공간이 그렇게 활용되기 시작했지만 동승자는 큰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도로시 레빗(Dorothy)

미국 최초의 여성 레이서로 스피드 걸로 불리는 도로시 레빗(Dorothy)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레빗은 자신이 쓴 '자동차와 여성(The Woman and the Car)'에서 동승자석 대시보드 아래에 장갑을 보관할 수 있는 비밀스러운 공간의 필요성을 처음으로 제기했다. 레빗이 세운 최초의 기록은 수두룩 하지만 현재까지 남아있는 흔적이 바로 글로브 박스인 셈이다. 

요즘 것과 비교해 크기는 작지만 잠금 장치가 있고 대시보드에 깜쪽같이 숨겨지는 현대적 개념의 글로브 박스는 1915년 피어스 애로우(Pierce Arrow)가 최초로 전해지고 있다. 이후에도 글로브 박스는 일부 브랜드에 제한적으로 적용됐고 본격적인 보급은 1930년대 들어서면서 시작했다.

대량 생산의 선도자 포드와 고급차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캐딜락에 글로브 박스가 장착되면서 이후 제조사마다 크기와 위치, 개수 등을 달리하며 경쟁을 벌였다. 글로브 박스는 기존 자동차에서 대시보드 중앙에 있던 클러스터를 운전석 쪽으로 몰아내기도 했다.

이후 자동차의 대시보드는 클러스터와 센터패시아, 글로브 박스로 3분할 디자인을 하는 것으로 정착됐다. 글로브 박스 역시 한 세기를 거치면서 진화했다. 주로 여성들이 사용하는 위치의 특성으로 메이크업을 위한 트레이와 소품이 들어가기도 했고 CD 체인저, 냉장 기능이 들어가기도 했다.

기아 EV9 파라볼릭 모션 글러브박스
기아 EV9 파라볼릭 모션 글러브박스

가장 최근의 변화는 냉장 기능과 함께 용량이 크게 늘어났다는 점이다. 기아 EV9의 글로브 박스 용량은 무려 8ℓ 이상이다. 일반적인 글로브 박스의 용량은 4~5ℓ 수준이다. EV9 글로브 박스는 포물선을 그리는 운동 메커니즘을 응용한 '파라볼릭 모션 글러브박스'로 용량을 크게 늘렸다. 

글로브 박스는 한 때 비밀스러운 소품을 보관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그러나 버튼키가 나오면서 아무도 모르게 숨겨둔 비상금 같은 비밀스러운 소품을 보관했다가 낭패를 보는 일도 생겼다. 이 때문에 최근에는 디스플레이를 통해 암호를 입력해야만 여닫을 수 있는 글로브 박스도 등장했다. 

자동차 실내에서 글로브 박스는 트렁크에 이어 가장 큰 수납 공간을 갖고 있지만 그 안에 무엇을 보관하고 있는지 무관심한 경우가 많다. 어쩌면 글로브 박스에 추억의 물건이나 혹은 잊고 있던 비상금이 있을지도 모른다. 당장 열어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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