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동화 시대 남겨야할 유산 #8] 16기통 파워트레인 '품위와 욕망의 상징'

양산차 적용 사례 드문 '최고급차' 엔진...전동화 시대에 채워질 과잉과 잉여는

  • 입력 2021.09.15 08:00
  • 수정 2021.09.28 08:41
  • 기자명 류청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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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 이상 소비, 잉여, 과잉을 즐기는 것을 사치라고 얘기한다. 자동차도 마찬가지여서, 고급차일수록 효율과 값 대비 성능 같은 현실적 가치 판단 기준보다 편안함, 쾌적함, 안락함 나아가 자기 만족과 같은 무형 가치를 중요시 한다. 특히 주행 특성 면에서 고급차 소비자들이 원하는 욕구를 채워 주려면 전통적으로 조용하고 진동이 적으면서도 강력한 엔진이 필요했다. 고급차 업체들이 내놓은 해법은 다기통 대배기량 엔진이다.

그래서 자동차 초기부터 럭셔리 브랜드 사이 치열한 엔진 기통수 경쟁이 벌어졌다. 설계는 물론 소재와 가공 기술이 부족했던 시기에 기통수를 늘리는 일은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려웠다. 다기통 대배기량 엔진이 고급스러움과 더불어 기술력을 상징하게 된 이유다. 1920년대 들어 고급차에 직렬 또는 V형 8기통 엔진이 보편화되자, 기술적 우월함을 드러내기 위한 기통 수 늘리기 경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1931년형 마몬 식스틴 컨버터블 쿠페. 마몬은 가장 먼저 V16 엔진 개발을 시작했으나 양산차 시판은 캐딜락보다 늦었다
1931년형 마몬 식스틴 컨버터블 쿠페. 마몬은 가장 먼저 V16 엔진 개발을 시작했으나 양산차 시판은 캐딜락보다 늦었다

미국 패커드가 직렬 8기통과 V12 엔진으로 큰 인기를 얻자 그에 대응하려는 브랜드들이 나타났다. 처음 양산차용 V16 엔진 개발을 시작한 곳은 마몬이다. 엔지니어 오웬 내커(Owen Nacker)가 부가티 항공기용 엔진에서 얻은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설계했다.

그러나 마몬이 이 엔진을 완성하기 전, 경쟁 업체 캐딜락이 내커를 스카웃해 한발 앞서 V16 엔진을 완성했다. 그리고 1930년 시리즈 452 모델에 V16 엔진을 올려 시판했다. 마몬이 내커 설계를 바탕으로 만든 V16 엔진을 식스틴(Sixteen)에 얹어 내놓은 것은 이듬해인 1931년이다. 

캐딜락의 첫 V16 엔진. 캐딜락은 마몬의 엔지니어를 서둘러 스카웃해 한발 앞서 양산차용 엔진을 완성했다
캐딜락의 첫 V16 엔진. 캐딜락은 마몬의 엔지니어를 서둘러 스카웃해 한발 앞서 양산차용 엔진을 완성했다

자동차 역사상 처음으로 16기통 엔진을 얹은 차가 등장한 시점은 상황이 썩 좋지 않았다. 고급차 시장이 한창 달아올랐을 때 개발이 시작된 16기통 엔진은 1929년 대공황으로 미국 경제가 파탄에 이른 직후 시장에 나왔다. 판매는 여의치 않았고, 마몬은 1933년 고급차 생산을 접어야 했다. 살아남은 캐딜락은 16기통 모델을 1940년까지 소수 생산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사라졌고 최상위 모델도 8기통 엔진만 썼다.

이후 양산 승용차 가운데 최다기통 엔진은 12기통으로 기록돼 있다. 승용차와 거리가 먼 존재였던 16기통 엔진은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자동차 마니아에게 주목을 받았던 치제타-모로더 V16T를 통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람보르기니에서 일했던 설계자 클라우디오 잠폴리가 세계적 음악가 조르조 모로더 투자를 받아 개발한 이 차는 람보르기니가 설계한 V8 엔진 두 개를 이어 붙인 V16 6.0L 엔진을 얹었다.

1980년대 후반 V16 엔진을 부활시켜 화제가된 치제타 V16T. 화제성에 비해 판매는 신통치 않았다 ((c)Jasen Delgado courtesy of RM Sotherby's)
1980년대 후반 V16 엔진을 부활시켜 화제가된 치제타 V16T. 화제성에 비해 판매는 신통치 않았다 ((c)Jasen Delgado courtesy of RM Sotherby's)

이 차는 여러 면에서 화제가 되었는데, 그 중 하나는 16기통 엔진을 가로로 배치한 것이었다. 10기통 이상 다기통 엔진은 길이 때문에 세로로 배치하던 통념을 깼다. 람보르기니가 미우라에 12기통 엔진을 가로로 배치한 적이 있지만, 치제타-모로더 V16T는 그보다 더 긴 엔진을 가로로 배치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뛰어난 성능에도 판매는 신통치 않았고 투자자 모로더가 일찌감치 손을 뗀 뒤 생산도 뒷받침되지 않아 마니아 관심에서 멀어졌다. 

이후 여러 브랜드가 16기통 부활을 시도했다. 캐딜락은 2003년 V16 13.6L 엔진을 올린 식스틴 콘셉트카를, 롤스로이스는 2004년 V6 9.0L 엔진을 얹은 100EX 콘셉트카를 선보였다. 그러나 상징성 만으로 수요와 비용에 대한 부담을 이기지 못하면서 어느 것도 양산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내연기관으로 부리는 사치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예전과 달라진 것도 한 몫을 했다. 

V16 엔진을 얹고 2004년에 선보인 롤스로이스 100EX 콘셉트카
V16 엔진을 얹고 2004년에 선보인 롤스로이스 100EX 콘셉트카

현재 16기통 엔진 승용차를 생산하는 브랜드는 부가티가 유일하다. 폭스바겐 그룹에 인수된 이후 새롭게 거듭난 뒤 2005년 생산된 베이롱 16.4를 시작으로 모든 차에 W16 8.0L 쿼드터보 엔진이 쓰이고 있다. 이 엔진을 양산차에 처음 쓴 브랜드는 부가티지만 그보다 앞서 벤틀리 유노디에르와 아우디 로제마이어 콘셉트카를 통해 존재를 드러낸 바 있다.

W16 엔진은 하나의 블록 안에 좁은 각도로 실린더를 엇갈려 배치한 폭스바겐 고유의 VR 엔진 설계를 활용한 것으로, 다른 폭스바겐과 아우디 양산차에 다양한 VR 및 W 엔진이 쓰였다. W16은 그 중 가장 큰 것으로, VR 8기통 엔진 두 개를 72도 각도로 결합한 구조다. 이런 특성 덕분에 16기통이면서도 일반적인 V8 엔진보다 길이가 더 짧다.

폭스바겐 그룹의 W16 엔진을 양산차에 처음 올린 부가티 베이롱 16.4
폭스바겐 그룹의 W16 엔진을 양산차에 처음 올린 부가티 베이롱 16.4

베이롱 16.4에 처음 쓰였을 때 1001마력이었던 최고 출력은 이후 슈퍼 스포트와 그랜드 스포트 비테스에서는 1201마력으로 높아졌다. 그리고 2016년에 2세대 모델 격인 시롱이 데뷔했을 때에는 1500마력으로 성능이 한층 더 높아졌고, 고성능 모델인 시롱 슈퍼 스포트와 브랜드 탄생 110주년 기념 모델인 센토디에치에는 같은 엔진의 1600마력 버전이 올라간다.

친환경과 전동화 흐름 속에서, 우리가 16기통 엔진을 얹은 차를 새롭게 접할 시간은 그리 길지 않은 듯하다. 초호화 자동차 브랜드의 상징인 부가티조차 전기 스포츠카로 이름난 리막과 한 식구가 된 만큼, 앞으로는 부가티도 '내연기관 최다기통'에 집착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부가티 시롱에 쓰이고 있는 W16 8.0L 쿼드터보 엔진
부가티 시롱에 쓰이고 있는 W16 8.0L 쿼드터보 엔진

이런 와중에 새로운 16기통 차를 내놓겠다는 계획을 밝힌 브랜드도 있다. 두바이 신생 브랜드 데벨 모터스가 그 주인공으로 최고출력이 일반 도로용 3000마력, 트랙 전용은 무려 5000마력에 이르는 V16 12.3L 쿼드터보 엔진 스포츠카 식스틴을 내놓는 것이 목표다.

이 차 엔진은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고 세계 여러 튜너와 커스텀카 제작자들이 애용하는 GM LS V8 엔진 두 개를 결합한 것이다. 다만 2008년 개발을 시작했다는 이 차가 언제쯤 완성될지는 미지수다. 만약 데벨 식스틴이 완성돼 구매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 시대 마지막으로 개발된 새 16기통 엔진 차를 경험한다는 의미에 특별한 만족감을 갖게 될지 모른다. 

두바이의 데벨 모터스가 개발 중인 V16 엔진 스포츠카 식스틴
두바이의 데벨 모터스가 개발 중인 V16 엔진 스포츠카 식스틴

애초 16기통 엔진이 등장한 것은 조용하고 부드러우면서 강력한 동력원에 대한 요구였다. 그러나 전기 모터는 복잡한 기계적 요소 없이 그 이상 욕구를 쉽게 충족할 수 있다. 따라서 전동화 시대 럭셔리 승용차는 동력원이 아닌 다른 영역에서 사용자에게 과잉과 잉여를 채워 주는 데 초점을 맞춰 만들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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