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 유감 단종차 #2. 4륜구동 SUV의 시작점 '현대차 갤로퍼'

  • 입력 2020.03.04 14:54
  • 수정 2020.03.16 16:31
  • 기자명 김훈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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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둔 대한민국은 '3저 호황(저달러, 저금리, 저유가)을 맞이하며 삶의 질이 향상되고 때마침 불어온 레저 붐과 함께 다목적 4륜구동 차량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이 시기 출퇴근용 소형차만을 생산하던 국산차 시장에서 해당 수요를 예측하고 신차 개발 프로젝트에 한 발 앞서 뛰어든 업체는 현대모비스의 전신인 현대정공. 당시 현대정공의 사장인 정몽구 회장은 故 정세영 회장이 현대차의 경영을 책임지며 본격적인 후계구도 경쟁이 시작되자 현대차그룹의 근간인 자동차 부문에서 성과를 보여야할 필요와 함께 신차 개발에 뛰어든다.

그리고 시작된 4륜구동 개발 프로젝트는 故 정주영 회장의 전폭적인 지지와 함께 'J카 프로젝트'란 이름으로 1988년 7월 본격적인 개발에 돌입한다. 또한 당시로는 한국 정부의 자동차 공업 합리화 조치가 이듬해 7월로 해제될 예정이라 현대정공의 자동차 개발에는 더욱 큰 힘이 실린다.

이후 J카 프로젝트는 1989년 6월, 미국 ECS ROUSH와 'X-100' 다목적 시제차 제작 계약을 체결하고 그해 8월 중순부터 마북리 기술 연구소에서 개발에 박차를 가한다. 당시 현대차가 독자 모델을 통해 미국 시장에서 성공을 거두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이들의 목표 또한 독자 모델을 개발하는데 있었다. 그리고 완성된 시제차는 1990년 3월부터 약 3개월 미국 현지에서 소비자 평가를 실시한다. 다만 첫 반응은 성능, 기술, 디자인 면에서 혹평을 받게된다. 당시로는 혼다, 토요타 등 글로벌 업체들이 이미 시장을 선점하고 있었고 이로 인해 품질의 기대치는 높았고 후발업체의 참여는 쉽지 않았다.

이 결과 정몽구 회장은 독자 개발을 보류하고 이미 시장에서 검증된 업체의 4륜구동 모델을 라이센스 생산해 완성도를 높이는 쪽으로 사업 방향을 선회한다. 그리고 선택된 모델이 내수용 디젤차 미쓰비시 '파제로(Pajero)'다. 미쓰비시는 현대차와도 이미 제휴를 맺어온 파트너였기에 협업도 쉬울 것이라는 판단이 크게 기여했다. 이후 1991년 9월 울산 염포동에는 연산 3만5000대 규모의 자동차 전용 생산 공장이 건설되고 갤로퍼 1호차가 생산된다. 디젤 롱바디 모델을 시작으로 같은해 11월에는 자동변속기 모델과 12월, 터보 디젤엔진 롱바디까지 시장에 선보인다.

현대차 엠블럼을 단 갤로퍼의 초기 시장 반응은 매우 폭발적이였다. 당시 쌍용차 코란도와 아사아자동차 록스타가 독점하던 4륜구동 시장에 파란을 일으킨 것. 현대차 갤로퍼는 이듬해 2만3738대의 판매고를 기록하며 국내 4륜구동 시장의 절반 가까운 51.9%의 점유율을 기록하기에 이른다. 1992년 현대정공이 갤로퍼로 벌어들인 수입은 2755억4000만원으로 전체 매출액의 약 22%를 차지해 단숨에 주력사업으로 도약한다. 갤로퍼는 1994년 12월 누적생산 10만대를 돌파하고 1997년 20만대 판매를 달성하는 등 판매 상승세가 이어졌다. 또한 1992년 11월 러시아와 불가리아 등 동유럽에 40대를 선적하며 시작된 수출도 매년 성과를 나타내 1994년 11월에는 중국시장에 진출하고 1998년 7497억원의 수입을 거뒀다.

한편 국내 완성차 시장은 1993년 여름 쌍용차의 무쏘, 기아차 스포티지 등이 선보이며 본격적인 SUV 활성화의 길을 걷는다. 국내 4륜구동 SUV의 신화를 창조한 갤로퍼는 이후 2003년을 끝으로 단종의 수순을 밟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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