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3월 국내 시장에 첫 등장한 삼성자동차의 'SM5'가 지난해 6월 2000대 한정판 'SM5 아듀'를 출시로 최종 단종 수순을 밟았다. 지난 21년간 102만대의 차량이 판매됐으며 연평균 5만대 이상을 기록하던 SM5는 명실공히 삼성자동차에서 르노삼성자동차에 이르기까지 브랜드 최장수이자 베스트셀러로 기억될 모델이다.1997년 삼성자동차는 2편의 30초짜리 TV 광고를 선보이며 이듬해 3월 삼성 엠블럼을 단 최초의 차량이 출시된다는 소식을 처음으로 알렸다. 차체 전후면을 위장막으로 가린 첫 번째
워커힐(그랜드 워커힐 서울, 서울 광진구)은 경치가 좋기로 유명하다. 한강을 남쪽으로 바라보면 잠실까지 이어졌던 고층 건물이 드문드문해지면서 제법 먼 곳까지 눈길이 확 트인다. 날씨가 맑으면 너르고 적당하게 몸을 낮춘 하남, 멀리 검단산, 남한산 절경을 아낌없이 보여준다.가을꽃 단풍빛이 살짝 비추기 시작한 10월 풍경은 더할 나위 없다. 그런데도 2005년 워커힐에서 만난 소진관 당시 쌍용차 사장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1999년 대우그룹 해체로 워크아웃에 돌입한 쌍용차는 2004년 중국 상하이 기차를 대주주로 맞이하고 단 1년 만
1997년 10월 국내 시장에 첫선을 보인 쌍용자동차 '체어맨'은 앞선 '무쏘'의 성공을 바탕으로 상용과 스포츠유틸리티차량 뿐 아니라 승용으로 라인업을 확장하려는 쌍용차의 포부가 느껴지는 모델이다. 체어맨이 세계 최초로 모습을 드러낸 1997년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서 당시 김석준 쌍용차 회장은 주요 임원들과 전략회의를 통해 특장차 전문 브랜드에서 종합 자동차생산업체로 이미지 전환을 기획하는 등 쌍용차에게 체어맨은 여러가지 깊은 의미를 지닌 모델임에는 분명하다. 참고로 체어맨 1호차를 전달받은 김 회장은
대우자동차 2002년형 매그너스 시승 기억을 떠 올려봤다. 2001년 어느 날, 옛 대우센타빌딩을 출발해 화성에 있는 자동차성능시험연구소(지금의 자동차안전연구원)까지 달렸다. 안면이 있는 연구원의 배려로 고속 주행로를 달렸다. 전력으로 서너 바퀴를 돌면서 잘 다듬은 4기통 2.0ℓ DOHC 가솔린 엔진의 힘이 유독 강렬했던 기억이 생생하다.연식변경에도 이전과 달라진 것들이 꽤 있었다. 고급 직물 시트, 호박색 방향지시등, 기본 적용된 ABS, 충격에 다른 압력이 감지되면 시트벨트를 다시 풀어주는 로드 리미트, 사이드 에어백, 레인센
한국지엠의 전신인 대우자동차 엠블럼을 달고 1990년 9월 국내 출시된 '에스페로'는 앞서 중형 세단 시장을 선점한 현대자동차 '쏘나타'를 겨냥해 대우차 최초의 독자개발 타이틀과 함께 야심 차게 탄생한 모델이다. 지금 봐도 군더더기 없는 디자인은 당시로는 생소한 0.29Cd의 공기저항계수를 달성하며 날렵하고 고급스러운 스타일을 한껏 강조했다. 특히 에스페로의 공기저항계수는 2008년 현대차 제네시스가 출시되기까지 약 18년 동안 유지될 만큼 시대를 앞선 설계로 일컬어진다. 당시 TV 광고 영상 중 F-1
IMF 경제 위기(1997년)는 대한민국의 일상을 바꿔버렸다. 평생직장으로 생각했던 회사에서 하루아침에 쫓겨난 실직자, 신용불량자가 속출했다. TV를 켜고 신문을 펼치면 망할 일이 없을 것 같았던 기업의 부도 소식이 끓이지 않고 또 가득했다. 직장을 잃은 지인들과 매일 폭주를 했다. 그러나 위기 때마다 빛을 발하는 저력을 가진 민족답게 오래지 않은 2001년 8월 IMF 구제금융에서 벗어난다.전철환 한국은행 총재가 이날 오전 10시 30분 IMF에서 빌린 돈 가운데 마지막으로 남은 1억4000만 달러를 상환하는 모습에 눈물을 흘렸었
'국내 최초 정통 스포츠카' 타이틀과 함께 1996년 출시된 기아자동차 '엘란'은 1999년 IMF 외환 위기와 함께 단종 수순을 밟기까지 자동차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모델이다. 일부에선 판매 수량 등을 두고 실패한 모델로 평가하지만 현재까지 관련 동호회가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것을 보면 짧은 순간 깊은 인상을 남긴 모델임에는 분명하다.기아차가 제너럴 모터스로부터 영국 로터스의 엔진과 변속기를 제외한 생산 권한을 인수하며 시작된 기아차 엘란의 탄생은 당시로는 생소한 2인승 시트 구조의 로드스터
소형차보다 짧은 전장(4050mm), 성인 높이의 전고(1635mm)를 가진 괴상한 차였다. 후미 쪽은 잘라낸 듯 뭉툭했고 계기반은 센터패시아 상단에 자리를 잡았고 앞 유리는 어색할 정도로 면적이 넓고 경사가 완만했다. 낮은 지상고에 높게 배치된 시트의 위치로 운전석에 앉으면 RV 이상의 시야를 갖게 했다.벨트라인이 낮고 측면의 유리 면적도 상당한 크기여서 개방감이 지나칠 정도였다. 오래전 시승을 하면서 그런 낯설던 것에 당황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2001년 현대차가 공개한 라비타(LAVITA)는 태생이 금수저였다. 페라리를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둔 대한민국은 '3저 호황(저달러, 저금리, 저유가)을 맞이하며 삶의 질이 향상되고 때마침 불어온 레저 붐과 함께 다목적 4륜구동 차량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이 시기 출퇴근용 소형차만을 생산하던 국산차 시장에서 해당 수요를 예측하고 신차 개발 프로젝트에 한 발 앞서 뛰어든 업체는 현대모비스의 전신인 현대정공. 당시 현대정공의 사장인 정몽구 회장은 故 정세영 회장이 현대차의 경영을 책임지며 본격적인 후계구도 경쟁이 시작되자 현대차그룹의 근간인 자동차 부문에서 성과를 보여야할 필요와 함께
새로운 사장에 취임한 누군가 현대차 울산공장을 순시하던 중 먼지가 가득 쌓인 자동차를 보고 말했다. "저게 왜 여깄어". 직원이 당황해하며 말했다. "포니 1호 차입니다" 사장의 얼굴에 노기가 보였다. "그러니까 포니가 왜 여기있냐고?" 다음날 국산 최초의 고유모델 포니 1호 차는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영영 볼 수 없었다.믿거나 말거나 확인된 이야기는 아니지만 오래전 현대차 직원에게 '포니 1호 차'가 어디 있냐고 물었을 때 들었던 얘기다. 회사 승계 과정이 치열했던 것도 있었지만 전임 사장의 치적을 터부시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