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에 독일 정권을 쥔 히틀러는 자동차의 보급을 국가 차원의 중요한 사업으로 추진하면서 이른바 '국민차' 기준을 제시했다. 1000 제국마르크(RM) 이하의 값으로 살 수 있는, 두 명의 어른과 세 명의 어린이를 태우고 최고속도 시속 100km를 낼 수 있으며 7ℓ 미만의 연료로 100km를 달릴 수 있는 차를 보급하겠다는 것이었다.독일 자동차 업계가 개발을 주저하자 히틀러는 나치당 주도로 차를 생산하겠다며 설계자를 찾았고, '독일 혈통의 독립 설계자'라는 기준에 맞는 설계자로 페르디난트 포르쉐(F
미국 육군은 1930년대 초반부터 포드 모델 T와 모터사이클을 대신해 군 전용으로 쓸 정찰용 소형차 개발을 추진했다. 여러 이유로 지지부진했던 개발은 1939년에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면서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고, 1940년 6월에 135개 자동차 회사에 설계 조건을 배포하고 입찰 참여를 요구했다.설계 조건은 2단 트랜드퍼 유닛을 갖춘 네바퀴 굴림 장치와 11.8kg・m 이상의 최대 토크로 시속 5~80km로 자유롭게 달릴 수 있는 엔진, 접이식 앞 유리를 갖추고 휠베이스 1905mm, 트랙 1194mm 이하의 차체에 적재
일본에서 발명가와 사업가로 큰 성공을 거둔 토요타 사키치(豊田佐吉)는 1923년 있었던 간토(關東) 대지진으로 철도가 무용지물이 된 것을 보고 자동차 시대가 머지 않았음을 예상했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 들어 미국 업체들이 일본 현지 공장에서 값싸고 품질이 고른 차를 대량 생산하면서 시장을 장악했다. 토요타 사키치의 장남인 토요타 기이치로(豊田喜一郎)는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일본 고유 대중차 개발에 나섰다.토요타 기이치로는 대학 시절 전공한 기계공학 지식과 아버지 회사인 토요타 자동직기에서 일하며 얻은 노하
1922년에 영국에서 세워진 스왈로우 사이드카 컴퍼니(Swallow Sidecar Company)는 윌리엄 라이언즈(William Lyons)와 윌리엄 웜슬리(William Walmsley)가 손잡고 만든 모터사이클용 사이드카 제작 회사였다. 이들은 사이드카를 만들면서 익힌 차체 제작 노하우를 바탕으로 자동차 차체 제작 즉 코치빌딩으로 영역을 넓혔고, 192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며 회사 이름을 스왈로우 코치빌딩 컴퍼니로 이름을 바꿔 차체 제작을 주력 사업으로 삼았다.그리고 1930년대 들어 궁극적으로 꿈꾸었던 자동차 생산을 준비하기
스웨덴을 대표하는 자동차 회사 볼보는 1920년대 중반 베어링 업체로 유명했던 SKF의 자회사로 출발했다. SKF는 사업 다각화 차원에서 판매 책임자로 있던 아사 가브리엘손(Assar Gabrielsson)을 자동차 부문 책임자로 임명해 사업을 추진하도록 했다. 가브리엘손은 1924년 6월 오랜 친구인 구스타프 라르손(Gustav Larson)을 만나 자동차 개발에 관해 의논을 시작했다. 당시 AB 갈코(Galco)라는 회사에서 일하고 있던 라르손은 프로젝트가 잘못되더라도 손해를 보지 않는 조건으로 계약을 맺고, AB 갈코에서 계속
철도와 자동차 경영자로 성공한 월터 크라이슬러(Walter P. Chrysler)는 GM에서 뷰익의 성공을 이끌며 당대 최고의 보수를 받았다. 그러나 GM 총수였던 윌리엄 듀런트(William C. Durant)와의 마찰로 회사를 그만두면서 엄청난 주식을 퇴직금으로 받았다. 그는 이후 경영난을 겪고 있던 윌리스 오버랜드(Willys-Overland), 맥스웰 차머스(Maxwell-Chalmers)를 회생시켜 성공한 경영자로서 미국 최고 갑부 중 하나가 되었다.여러 회사를 거치면서 자신의 이름으로 차를 만들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월터 오웬 벤틀리(Walter Owen Bentley)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높이 평가받던 엔지니어 중 한 사람이었다. 전쟁 중 군에 복무하며 항공기 엔진 개발에 참여했던 그는 1919년에 제대하면서 오랫동안 자신이 꿈꿨던 차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가 나중에 벤틀리 차에 관해 이야기했던 '빠른 차, 좋은 차, 동급 최고의 차'라는 표현은 그가 생각하던 이상적 차의 모습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었다.벤틀리는 만든 첫 차를 내놓기에 앞서 시험용 차부터 만들었다. 첫 번째 시험용 차인 EXP 1은 시험주행에서 두각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프랑스에서 자동차를 만드는 곳은 수 백 개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들의 만드는 차들은 대부분 여전히 산업의 산물이라기보다는 공방에서 만드는 수공예품에 가까왔다. 전쟁 중 군수품 생산에 뛰어들어 대량생산을 경험한 기업가는 많았지만, 전쟁이 끝난 뒤에 자동차 생산에 뛰어든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 많지 않은 사람 중 하나가 앙드레 시트로엥(Andre Citroen)이었다. 시트로엥은 20세기 초에 기어 즉 톱니바퀴 생산으로 부와 명성을 얻었다. 특히 V자형 톱니가 있는 이중 헬리컬 기어는 소음이 적고 효율적이
1911년부터 자동차 역사에 등장한 쉐보레는 GM을 창업한 윌리엄 듀런트(William C. Durant)가 투자자들에 의해 퇴출된 뒤에 세운 회사다. 듀런트는 새 자동차 회사를 만들기 위해 이름난 자동차 경주 선수이면서 엔지니어이기도 했던 루이 쉐보레(Louis Chevrolet)와 손을 잡았고, 그의 이름이 곧 회사 이름이 되었다.쉐보레 브랜드의 첫 차는 타입 C로, 당대에는 쉐보레 브랜드로 나온 처음이자 유일한 모델이어서 그냥 쉐보레라고 불리기도 했고, 1914년에 모델 H와 L이 나온 뒤에 구분을 위해 클래식 식스 시리즈 C
이탈리아 출신 기술자인 에토레 부가티(Ettore Bugatti)는 1890년대 후반에 직접 자동차를 설계하기 시작했다. 그는 1898년에 이탈리아 프리네티 & 스투치(Prinetti & Stucchi)에서 만든 첫 차를 시작으로 드 디트리시(De Dietrich), 도이츠(Deutz) 등에서 일하며 다양한 차를 만들었다. 1909년에는 스페인 은행가인 아우구스틴 드 비카야(Augustin de Vizcaya)로부터 투자를 받아 당시 독일 영토였던 프랑스 알사스 지방의 몰셈(Molsheim)에 회사를 세우고 자신의 이름을 내세운 자
지금은 사라졌지만, 영국 자동차 역사에서 오랫동안 큰 비중을 차지했던 브랜드 중 하나로 로버(Rover)를 빼놓을 수 없다. 로버는 자전거, 모터사이클, 자동차 순으로 제품 생산을 발전시킨 브랜드 중 하나이기도 하다. 로버의 첫 차는 1904년에 처음 등장했는데, 당시만 해도 로버는 자전거와 모터사이클 생산을 계속 하고 있었다. 로버가 자동차를 생산하게 된 것은 1901년에 회사를 인수한 H. J. 로슨(H. J. Lawson)의 영향이 컸다. 사업가인 로슨은 1896년에 데임러(Daimler, 독일 다임러 특허 엔진을 영국에서 생
1902년, 헨리 포드의 자동차 사업에 투자했던 윌리엄 머피(William Murphy)와 르뮤엘 보웬(Lemuel W. Bowen)은 포드의 개발 방향에 불만을 갖고 회사를 청산하려고 했다. 그들은 이미 갖춰 놓은 공장과 설비를 매각하기 위해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을 초빙해 왔다. 평가를 마친 그는 머피와 보웬에게 설비를 매각하지 말고 새 자동차 회사를 만들라고 부추겼다. 그러면서 자신이 개발해 올즈모빌에 납품하려다가 거절당한 엔진을 보여줬다.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두 사람은 1902년 8월에 새로운 자동차 회사를 세웠다. 회사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