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식 칼럼] '출발선 조정' 위기에 처한 현대차, 반전 기회를 잡은 토요타

  • 입력 2022.09.06 14:00
  • 기자명 김흥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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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지난 5월 한국을 방문한 미국 바이든 대통령에게 70억 달러 규모의 투자 선물을 줬다. 그러나 바이든 대통령은 8월 인플레이션 감축법으로 현대차를 전기차 보조금 대상에서 제외했다.(사진 현대자동차 제공)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토요타 전동화는 글로벌 완성차 가운데 가장 뒤처진 것으로 봤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부닥쳐야 하는 지엠(GM)과 포드, 폭스바겐, 현대차가 경쟁적으로 전기차 플랫폼을 만들고 신차를 내 놓는데도 내연기관 하이브리드카를 붙들고 있었던 탓이다.

거대 시장인 미국과 유럽에서 전기차 수요가 빠른 속도로 늘어나는데도 토요타는 느긋했다. 대중차 경쟁에서 턱밑까지 추격한 현대차가 전기차를 무지 팔고 주요 상을 휩쓸어도 하이브리드카를 고집했다. 토요타 아키오 사장이 미국과 유럽의 급속한 전기차 전환을 우려하며 '하이브리드 로비'를 했다는 얘기도 들렸다.

토요타 전동화 플랜이 구체적으로 나온 건 지난해 12월이다. 아키오 사장은 그 때, 83조 원을 투자해 전 차종 전기차 개발, 2035년 렉서스 완전 전기화, 전고체 배터리 그리고 2030년 350만 대를 팔겠다고 구상을 밝혔다. 그러나 이때 시장 반응은 환경 규제에 어쩔 수 없이 내 놓은 계획이고 대체로 "너무 늦었다"는 비판이 많았다.

현대차그룹이 E-GMP 아이오닉 5, EV6로 세계 시장에서 돌풍을 일으키던 때였고 폭스바겐 ID 시리즈, 테슬라, 중국의 크고 작은 브랜드가 이미 전기차 산업을 주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토요타가 의욕적으로 출시한 전기 신차 'BZ4X'의 바퀴가 주행 중 빠지는 어이없는 결함 얘기가 나오면서 전망이 맞는 듯했다.

그러나 미국 바이든 정부의 '인플레이션 감축법'이 상황을 반전시킬 기미다. 미국에서 만든 전기차, 배터리 원산지뿐 아니라 소재의 생산지까지 따져 보조금을 주겠다는 이 법은 미 대통령 서명 즉시 발효돼 현대차는 현지 생산이 가능해지는 2024년까지 한대당 최대 7500달러(약 1000만 원)의 전기차 보조금을 받지 못하게 됐다.

아이오닉 5가 보조금을 받지 못하면 테슬라 모델 3 수준으로 가격이 오른다. 지엠 볼트 EV와 EUV와는 가격을 비교하는 것에 의미가 없을 정도로 경쟁력을 잃게 된다. 현지 생산을 시작할 때까지 전기차 장사를 접어야 할 판이다. 반면 토요타는 까마득히 앞서가던 현대차와 출발선에 같이 설 기회를 잡았다.

도요타 아키오 토요타 사장은 인플레이션 감축법 발효 직후 미국 현지 전기차 및 배터리 생산에 56억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밝혔다.(사진 토요타 제공)

토요타는 잃었던 것보다 더 많을 걸 얻을 수 있는 기회로 보고 기다렸다는 듯, 56억 달러(약 7조 6000억 원)를 들여 전기차와 배터리 생산 시설 구축에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장기적으로는 2030년 투자를 완료할 계획이지만 2025년 현지에서 생산할 전기차 라인을 늘리겠다는 계획도 포함돼 있다.

현대차는 이르면 2024년 전기차 현지 생산이 가능해진다. 현대차와 토요타의 현지 생산 격차가 1년으로 좁혀진 셈이다. 토요타 입장에서 보면 "현대차와 비슷한 시기, 같은 조건으로 다시 경쟁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은 셈이다. 

현대차와 토요타 모두에게 미국은 판매량뿐 아니라 자존심 싸움을 벌이는 매우 중요한 시장이다. 그런 이유로 뒤늦게 정부 협상단이 미국을 찾아 항의하고 정의선 회장이 오랜 시간 현지에 머물며 해결책을 찾았지만 소득이 없었다. 뒷북도 이런 뒷북이 없고 미국 법을 바꾸는 일이 가능하다고 보는 것도 무리다.

이 보다는 다시 서야 할 출발선을 앞당겨 긋는 것에 주력할 필요가 있다. 우선은 보이지 않는 유예기간을 활용해 현재 가동 중인 내연기관 생산 시설을 빠르게 전환해야 한다. 알려진 것과 다르게 현대차와 경쟁하는 미국산 전기차 상당수는 당장 보조금을 받을 수 없다. 인플레이션 감축법이 시행됐어도 연간 20만 대 한도 규정에 따라 대부분 전기차는 올해 보조금을 받지 못한다.

지엠 볼트 EV와 볼트 EUV는 이미 판매량 한도에 도달, 인플레이션 감축법 시행에도 올해 말까지는 보조금을 받을 수 없다. 판매량 한도에 도달하지 않은 상당수 전기차 역시 5만 5000달러 이하라는 가격 제한으로 보조금을 받지 못한다. 보조금 역시 우리식으로 하면 2023년 소득 세액에서 공제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구매자 실질 체감 혜택은 2024년에야 나타난다. 길지 않지만 활용해 볼 가치는 있는 시간이다.

어찌됐든 독일과 일본, 미국 등 경쟁사와 격차를 좁히기 위해 지난 수십 년 부단한 노력을 펼치고 마침내 전기차로 승기를 잡고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고 생각한 현대차에게 인플레이션 감축법은 큰 위기다. 하지만 토요타는 기회를 잡았다. 현대차가 내심 경계하고 있는 것도 애써 따돌려 놓은 토요타가 전기차 경주의 출발선에 같이 설 수 있게 됐다는 것일지 모른다. 위기와 기회의 때를 다른 입장으로 맞닥뜨린 현대차와 토요타의 대응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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