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차는 ‘전동화 시대 남겨야 할 유산’ 시리즈 첫 연재에서 다룬 토요타 코롤라다. 1966년 11월에 일본에서 처음 판매되기 시작한 코롤라는 2021년 7월에 판매량이 5000만 대를 넘어섰다.
자동차 역사는 현재 진행형이다. 그래서 코롤라는 단종되지 않는 한 계속해서 자동차 역사상 최다 판매 모델 기록을 갈아치울 것이 틀림없다. 자동차 구매를 고려한다면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가격대에, 세계 각지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판매되며 폭넓은 소비자의 요구를 채우는 모델이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코롤라처럼 세계 누적 판매량 기록을 갖고 있던 차들도 있다. 2007년에 코롤라가 왕좌를 빼앗은 폭스바겐 비틀, 1972년 비틀이 추월한 포드 모델 T가 대표적이다. 이들 가운데 모델 T는 생산과 판매 속도 면에서 놀랍다. 1908년부터 1927년까지 19년 남짓한 시간 사이에 생산된 모델 T는 공식적으로 1500만 7033대다.
지금도 계속 세계 각지에서 팔리고 있는 코롤라와는 달리, 이미 생산이 중단된 비틀 기록은 다른 차들에 의해 계속해서 깨지고 있다. 1948년부터 지금까지 판매된 포드 F-시리즈 픽업 트럭은 4000만 대가 넘는다. 그러나 F-시리즈는 같은 모델로 묶기 어려울 만큼 크기가 다양한 변형 모델이 있어 단일 모델이라 하기 어려운 면도 있다. 비틀로부터 바통을 넘겨받은 폭스바겐 간판 모델 골프도 만만치 않게 팔렸다. 이미 2002년에 비틀 기록을 깼고, 2019년에 누적 판매량 3500만 대를 넘겼다.
그러나 단일 모델로 기록한 최다 누적 판매량은 어느 차도 비틀을 뛰어넘지 못한다. 1938년에 볼프스부르크에서 생산되기 시작해 2003년 멕시코 푸에블라에서 긴 역사의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세상의 빛을 본 비틀은 모두 2152만 9464대다. 우리나라 기준으로 보면 일제 강점기에 개발되어 생산을 시작했던 차가 고 노무현 대통령의 임기가 시작될 무렵에 단종된 것이다.
비틀은 처음 만들어졌을 때의 기본 설계가 단종될 때까지 이어졌다. 컨버터블을 포함해 소소한 변형 모델들이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2도어 세단 형태의 차체와 공랭식 엔진을 뒤 차축 뒤에 얹은 뒷바퀴굴림 구동계 구성도 한결같았다. 르노 4, 클래식 미니, 시트로엥 2CV 등 비슷한 방식으로 장수한 차들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들의 누적 판매량은 모두 1000만 대에도 미치지 못했다.
비틀 기록을 이미 깼거나 위협하고 있는 모델들은 대개 세대가 바뀔 때마다 대대적 변화를 거친 차들이다. 장비 구성이나 안팎 모습 어느 것도 비틀만큼 고집스럽지 않다. 이미 자동차 업계가 ‘계획된 진부화(planned obsolescence)’가 당연해진 지 오래고,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강화되는 안전과 환경 관련 규제는 변화를 강제하는 중요한 요소다.
비틀이 특별한 이유 중 하나는 시장에 따라 소비자들이 차를 받아들인 방식이 달랐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코롤라 다음으로 많이 팔렸다고 하는 포드 F-시리즈는 생산량 대부분이 북미 대륙에서 소화되었다. 그러나 비틀은 유럽과 북미에서 상당 부분 팔리긴 했어도 실제 시장은 전 세계였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비틀을 받아들인 방식이 시장마다 다른 것은 당연한 이치다.
비틀이 세상 빛을 보기 전부터 계획된 진부화에 길들여져 있던 미국 소비자들에게는 여러 면에서 신기한 차였다. 모든 자동차 업체가 해가 바뀔 때마다 여기저기 뜯어고치고 조금씩 덩치를 키우며 값을 올려받고 있을 때, 시대착오적인 모습의 작은 독일 차는 같은 모습을 계속해서 유지했다.
물론 비틀도 끊임없이 이곳저곳 조금씩 바뀌었다. 워낙 조금씩 작은 부분들이 바뀌어 사람들이 쉽게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이다. 이런 특징은 광고대행사 DDB의 유명한 광고 캠페인에 반영되기도 했다. 시장의 보편적 원칙을 거스르는 ‘반항적’ 모습을 역으로 마케팅에 활용한 것 역시 반항적인 접근 방식이었다.
20세기 중후반 저개발 국가에서는 비틀이 모터리제이션이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비틀은 중남미, 오세아니아,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등 독일 외 다른 지역에서도 조립 생산이 이루어졌다. 특히 도로 사정이 좋지 않은 저개발 국가에서는 적당한 크기와 값에 막 굴려도 잘 버텨주는 비틀이 잘 팔릴 수밖에 없었다. 일본 차가 세계 시장을 휩쓸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럼에도 어느 시장에서든 공통적으로 인정받은 장점은 뚜렷했다. 비틀은 세계 어디에서나 단순하고, 튼튼하고, 사고 쓰기에 부담스럽지 않은 차였다. 고장이 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고치기는 쉬웠다. 많이 팔린 만큼 부품도 많았고, 정비할 수 있는 사람도 많았다.
무엇보다도 골치아픈 고장이 날 만큼 복잡한 차가 아니었다. 공랭식 엔진은 냉각수가 필요 없어 혹독한 추위 속에서도 문제가 없었고, 속도를 내어 달릴 수만 있다면 적도 가까운 사막에서도 무리 없이 쓸 수 있었다. 글로벌 시장에서 소비자들에게 독일 차에 대한 믿음을 심는 데에는 메르세데스-벤츠와 더불어 비틀의 역할이 컸다.
그러나 생산이 끝날 즈음에 이르렀을 때에는 비틀이 소수의 애호가들을 위한 ‘추억의 아이템’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자동차에 대한 현대 사회의 요구를 받아들이기에는 비틀은 이미 너무 작고 낡은 차였다. 전성기가 각종 규제가 느슨했던 시대에 전성기를 보내고, 선진국에서 저개발국에 이르기까지 세계 곳곳의 모터리제이션을 이룬 것으로 비틀은 이미 제 역할을 다 했다.
비틀은 내연기관 시대에 가장 대중적이면서 가장 컬트적인 차다. 비틀처럼 사회문화적으로 영향력있고 의미가 큰 차는 앞으로 다시 볼 수 없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