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동화 시대 남겨야 할 유산 #4] '오프로더의 아버지' 윌리스 MB와 그 유전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등장한 거의 모든 오프로더가 추종한 전설

  • 입력 2021.09.06 15:00
  • 수정 2021.09.28 08:42
  • 기자명 류청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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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현대적 오프로더의 기원이라 할 윌리스 MB '지프'
모든 현대적 오프로더의 기원이라 할 윌리스 MB '지프'

네바퀴굴림 차 혹은 오프로더의 기원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차가 윌리스 MB다. 네바퀴굴림 장치를 처음 쓴 차는 아니었지만 한 장르를 정의한 차와 다름없다. 포드가 생산한 GPW와 함께 윌리스 MB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지프 브랜드의 뿌리기도 하지만, 윌리스 MB와 그 혈통을 이은 CJ 시리즈는 현대 오프로더의 시발점으로서 그 영향력이 상상을 초월할 만큼 대단했다.

윌리스 MB의 프레임으로 만든 오리지널 랜드로버 프로토타입
윌리스 MB의 프레임으로 만든 오리지널 랜드로버 프로토타입

지프와 어깨를 나란히하는 SUV 전문 브랜드 랜드로버도 그 뿌리는 지프에서 시작했다. 1948년 로버 엔지니어였던 윌크스 형제는 미국이 영국에 남기고 간 윌리스 지프의 섀시를 가지고 다목적 네바퀴굴림 차 개발을 시작했다. 영국 내 농장에서 다목적으로 쓰기에는 지프도 나쁘지 않았지만, 부품 수급 등 현지 여건에 맞지 않는 점이 많았다. 그래서 영국(구체적으로는 로버)에서 쉽게 조달할 수 있는 부품들을 가지고 개념은 지프와 비슷하면서 다목적으로 쓰기에 더 좋은 차로 만든 것이 랜드로버였다.

이탈리아판 지프, 알파 로메오 1900M '마타'
이탈리아판 지프, 알파 로메오 1900M '마타'

제2차 세계대전 중 지프의 주 무대 중 하나였던 유럽에서는 전쟁이 끝난 뒤 지프를 면허 생산한 모델과 아류작이 쏟아져 나왔다. 이탈리아에서는 피아트 캄파뇰라(Campagnola)/알파 로메오 1900M ‘마타(Matta)’가 윌리스 MB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거의 같은 개념으로 만들어졌고, 이 차는 옛 유고슬라비아의 자동차 회사 자스타바(Zastava)가 면허 생산하기도 했다. 프랑스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군이 지프와 부품을 대량으로 공여했는데, 상태가 천차만별이어서 이를 재생하고 쓸만한 부품을 조합해 완성차로 만들어 프랑스 군과 정부기관에서 활용하기도 했다.

미츠비시가 면허 생산한 '미츠비시 지프'
미츠비시가 면허 생산한 '미츠비시 지프'

일본 미츠비시는 아예 윌리스와 계약을 맺고 1953년부터 지프를 면허 생산하기 시작했다. 물론 시간이 흐르면서 여러 부분이 현지화되고 처음에는 관공서와 자위대에만 공급되던 것이 민수용으로도 판매되기도 했다. 재미있게도 외모와 기본 설계가 크게 바뀌지 않은 채 1998년까지 생산되었다. 이들 모델 일부는 1960년대에 미군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와 국군이 쓰기도 했다. 미츠비시의 지프 생산 경험은 SUV 고유 모델인 파제로 개발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파제로는 우리나라에서도 현대(도입 당시에는 현대정공) 갤로퍼로 생산되었는데, 이 역시 현지화에 이어 한층 더 발전한 모델인 테라칸 개발로 이어지기도 했다.

지프 생산으로 시작해 회사를 일군 마힌드라는 현지화 과정을 거쳐 지금도 지프 스타일 오프로더를 내놓고 있다. 사진은 마힌드라 타르
지프 생산으로 시작해 회사를 일군 마힌드라는 현지화 과정을 거쳐 지금도 지프 스타일 오프로더를 내놓고 있다. 사진은 마힌드라 타르

인도 마힌드라는 1948년부터 윌리스 지프(CJ-3A)를 생산하기 시작한 것을 시작으로 지프와의 연을 맺었다. 지프 생산과 판매로 성장의 밑거름을 다진 마힌드라는 이후 소형 상용차와 농업용 트랙터 등으로 사업을 확대했고, 인도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마힌드라는 처음에는 모든 부품을 윌리스로부터 공급받아 조립 생산만 했지만, 이후 면허 생산으로 전환하고 부품에 이어 동력계에 이르기까지 많은 부분을 현지화했다. 이렇게 초기 CJ 시리즈를 바탕으로 만든 모델은 최신 모델인 타르(Thar), 록소르(Roxor)를 통해 지금까지도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필리핀의 명물 교통수단 지프니도 그 뿌리는 윌리스 MB다
필리핀의 명물 교통수단 지프니도 그 뿌리는 윌리스 MB다

필리핀에서는 현지에서 매각되거나 공여된 미군 지프가 운송수단으로 개조되어 큰 인기를 얻었다. 크롬도금 장식과 부품을 쓰는 등 화려하게 치장해 필리핀의 명물이 된 이런 지프들은 ‘지프니(Jeepney)’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져 있다. 물론 이렇게 오리지널 지프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지프니들은 낡고 부품을 구하기 어려워지며 차츰 사라졌다. 그러나 그와 같은 용도로 쓸 차들에 대한 수요는 꾸준해, 다른 상용차의 섀시와 부품을 가지고 겉모습만 옛 지프처럼 꾸민 차들이 새로운 지프니로 세대교체되었다. 그나마도 최근에는 필리핀의 교통수단 현대화 정책과 안전 문제 등으로 대대적 변화를 앞두고 있다.

1974년부터 생산된 신진 지프는 이후 '코란도'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1974년부터 생산된 신진 지프는 이후 '코란도'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1974년에 신진자동차가 미국 AMC(당시 카이저)와 제휴로 CJ-5 기반의 현지화 모델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냥 ‘신진지프’라는 이름으로 팔렸지만, 1980년 리비아 수출이 문제가 되어 AMC가 상표권을 회수해 ‘한국인은 할 수 있다’는 뜻의 코란도(Korando)를 새 상표로 쓴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CJ-5 바탕의 코란도는 1996년 뉴 코란도 출시 때까지 22년간 생산되었다.

기아 레토나도 지프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모델이다
기아 레토나도 지프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모델이다

한편 1978년부터 아시아자동차(현 기아자동차)가 생산한 K-111도 지프의 영향을 받은 차다. 오리지널 윌리스 MB의 뒤를 이어 미군이 썼던 다목적 차 M151A1의 설계에 M38 시리즈의 디자인을 적절히 변형해 만든 것이 K-111이다. K-111은 이후 아시아의 첫 민수용 모델인 록스타와 록스타 R2의 뿌리가 되었고, K-111의 후속 모델 K-131은 1세대 기아 스포티지와 같은 혈통이면서 록스타의 후속 모델 격인 기아 레토나와 형제 모델이기도 하다.

기술적으로 직접 연관되지는 않았어도 오리지널 지프의 검증된 개념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아류작들은 많다. 사진은 닛산 패트록
기술적으로 직접 연관되지는 않았어도 오리지널 지프의 검증된 개념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아류작들은 많다. 사진은 닛산 패트록

그밖에도 토요타 랜드크루저, 닛산 패트롤, 다이하츠 타프트, 스즈키 짐니, GAZ-67 등 수많은 오프로더가 기술적 관점에서 직접 영향을 받지는 않았어도 윌리스 MB를 통해 검증된 개념을 바탕으로 탄생했다. 브라질 윌리스 지사를 인수한 포드가 오리지널 지프의 혈통을 이어받은 모델을 생산하기도 하는 등, 관련된 차들의 탄생과 몰락에 관한 이야기들은 수없이 많다.

윌리스 MB는 탄생 이후 지프 브랜드는 물론 수많은 오프로더에 영향을 주었다
윌리스 MB는 탄생 이후 지프 브랜드는 물론 수많은 오프로더에 영향을 주었다

1980년대 이후 승용 개념을 강조한 SUV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나아가 승용차 플랫폼에 SUV의 외형을 입힌 도시형 '소프트로더(softroader)'와 크로스오버 SUV들이 시장의 주류가 되었다. 그럼에도 간결한 구조와 외형, 본질적 기능에 충실한 설계로 만든 오프로더들은 여전히 살아남아 있다. 윌리스 MB는 직계 후손 격인 지프 랭글러뿐 아니라 모든 현대적 오프로더의 아버지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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