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의 피비린내 나는 복수, 오일 필터 공장부터 문을 닫는다

  • 입력 2020.01.06 09:27
  • 수정 2020.01.06 10:54
  • 기자명 김흥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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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린스 페인 감독의 1996년 다큐멘터리 영화(사진) '누가 전기차를 죽였나?' 그리고 2006년 그가 다시 내 놓은 '전기차의 복수'는 1900년대 초반 유럽과 미국 시장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렸던 전기차, 1996년부터 생산돼 극찬을 받았던 GM EV1이 갑작스럽게 사라진 이유를 놓고 거대 석유 사업자 그리고 자동차와 연결된 정부의 음모론을 다룬다. 지난 100년간 음모론 주범들의 확실한 보호를 받으며 자동차 산업을 지배한 내연기관차는 그러나 이제 전기차의 피비린내는 복수에 종말을 걱정하는 처지가 됐다. 

세계는 지금 전기차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으며 이로 인해 내연기관은 물론 이를 중심으로 유지돼 왔던 연관 산업마저 휘청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2008년 등장한 테슬라의 판매 누계가 100만대를 향해 질주하면서 '전기차의 복수'는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2017년 연간 1700여대를 팔았던 겨우 테슬라는 2018년 14만6000대, 지난해 30만대를 돌파했다. 최근에는 중국 공장(기가 팩토리3)이 본격 가동되기 시작했고 테슬라는 연간 100만대 생산을 공언하고 있다.

기업 역사 10년에 불과한 테슬라가 스코다, 시트로엥과 같은 100년 역사를 가진 브랜드의 생산 규모와 맞먹는 수준으로 급성장했다. 2017년 98만대 수준이었던 전기차의 글로벌 시장 판매량 역시 2018년 137만대, 2019년 200만대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2040년에는 전기차가 내연기관차를 추월할 것이라는 보고서도 나왔다. 유럽에서의 내연 기관 종말은 더 빨라질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유럽에서 팔린 신차의 10% 이상이 전동화 자동차였고 연초 대비 연말로 갈수록 전기차의 판매 증가세는 빨라졌다. 노르웨이와 같은 북유럽 국가에서는 30% 이상이 전기차로 대체되고 있다. 세계 최대의 자동차 시장 중국에서도 연간 100만대가 팔리고 있다. 전기차 비중이 높아지면서 보쉬, 델파이, 덴소 등 거대 부품 업체들은 대규모 구조조정에 들어갔고 내연기관 소모품을 만들고 있는 일부 영세 중소 규모의 회사는 이미 문을 닫기도 했다. 

블룸버그 등 주요 경제 매체에 따르면 보쉬는 인도 사업부 2만명의 일자리를 삭감할 것으로 예상된다. 델파이, 콘티넨탈 등도 인력 감축을 포함한 구조 조정에 착수할 것으로 보고 있다.  전기차 판매 증가로 가장 먼저 타격을 받게 될 업종은 오일, 필터류와 같이 내연기관차 유지에 필요한 필수 소모품이다. 전기차 비중이 높은 북유럽은 물론 자동차 강국인 독일에서도 오일 필터와 같은 내연 기관 소모품을 생산 업체가 이미 문을 닫았거나 줄도산을 걱정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뉴욕 타임스에 따르면 독일 괴팅겐(Ohringen)에 있는 에어 필터 공장이 최근 문을 닫으면서 240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2만개가 넘는 부품으로 만들어지는 내연기관차와 달리 전기차는 7000개 수준에 불과하다. 앞으로 사라지게 될 부품의 수가 현재의 절반 이상이 될 것이고 그만큼 관련 기업의 수, 종사자의 수도 줄게 된다. 부품의 수가 줄고 이에 따라 자동차 조립 과정이 단순화되면 완성차 업체의 인력 조정도 불가피하다.

누가 전기차를 죽였나에서 주범으로 꼽힌 석유 사업자들 역시 전기차의 칼날을 피하지 못할 것이 뻔하다. 비싼 가격, 짧은 주행 범위, 충전 불편 때문에 전기차는 절대 대중화될 수 없다고 했던 비관론자들도 머쓱해졌다. 기존 배터리의 효율성이 비약적으로 개선되면서 충전량 대비 주행 범위가 내연기관차 수준으로 늘어났고 지속해서 가격도 내려가고 있다. 충전소의 증가로 충전 불편이 해소되기 시작했고 충전을 하는 창의적인 방법도 쏟아져 나오고 있다.

지금 한창 개발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전고체 배터리 등 새로운 수단이 등장하면 내연기관차의 종말은 더 빨라지게 된다. 자율주행을 기반으로 하는 전기차 보급이 늘면 프리미엄 브랜드의 종말이 가장 먼저 시작될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주문 제작 또는 수작업으로 만들어지는 슈퍼카 브랜드와 달리메르세데스 벤츠, BMW, 아우디, 재규어 등 많이 팔아야만 생존할 수 있는 이들 프리미엄 브랜드도 전기차를 만들고 있지만 대중 브랜드의 전기차와 가격으로 맞설 처지가 아니다. 

테슬라 모델3의 전례로 봤을 때, 전기차는 사치보다 실리에 중점을 둔 수요가 많다. 따라서 프리미엄 브랜드도 저가의 전기차 중심으로 모델 라인업을 재편해야 하지만 대중 브랜드의 벽을 넘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전기차와 자율주행, 커넥티드로 재편될 미래 자동차의 변화에 어떻게 대응했는지는 완성차, 부품사, 협력사 모두의 생존 여부를 가름하게 된다.

전기차의 복수가 더 살벌해 보이는 것은 시장 변화에 대응하고 생존하기 위해 천문학적 투자가 필요하고 이런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고용을 축소하고 공장을 재편하는 구조조정에 나서도록 하고 있다는 것이다. 매켄지는 오는 2030년, 기존의 자동차 시장 규모를 전기차와 자율주행차 같은 새로운 산업이 추월할 것으로 전망했다. 100년 전, 그보다 가까운 1990년대 거대한 음모로 사라졌던 전기차가 내연기관차 스스로 제 팔을 잘라내야만 살아남도록, 피비린내 나는 복수극을 벌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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