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조 508 GT, 세단으로 진화하는 실험은 성공했을까

  • 입력 2019.06.17 12:40
  • 수정 2019.06.17 13:31
  • 기자명 김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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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V와 크로스오버의 열풍이 전 세계 자동차 시장을 휩쓸면서, 자동차 회사들에게는 두 가지 고민이 생겼다. “어떤 SUV를 만들어야 잘 팔릴까?”, 그리고 “잘 팔리지 않는 세단을 어떻게 해야 할까?”가 그것이다. 지난 세기동안 자동차 시장의 이데올로기를 지배해 왔던 세단이 시험대에 오른 것이다.

제조사마다 솔루션은 다르다. 토요타 캠리, 혼다 어코드, 현대차 쏘나타 등 북미 시장에서 큰 볼륨을 차지하는 중형 세단들은 스포티한 디자인을 내세우는 동시에 편의사양을 잔뜩 집어넣고 몸집을 한껏 키우는 등, 세단을 SUV보다 저렴하지만 세련되고 가성비 좋은 차로 리포지셔닝하는 추세다. 이들의 공세를 버텨내기 버거운 포드, 쉐보레 등 미국 제조사들은 아예 세단을 수 년 안에 모조리 단종시키고 SUV에 집중하겠다는 폭탄 선언까지 했다.

그리고 여기, 남들과는 다른 ‘진화 실험’을 시작한 회사가 있다. 프랑스의 푸조다. 으레 신차는 전 세대보다 더 크고 넓어지기 마련이지만, 푸조의 플래그십 세단 508은 과감히 몸집을 줄인 대신 매혹적인 디자인을 두르고 스포츠 쿠페의 자리를 넘본다. SUV의 범람 속에서 푸조가 선택한 508의 진화는 성공할 수 있을까?

한 번 보면 잊기 힘든 디자인

508에서 가장 강렬한 부분을 꼽는다면 첫째도 둘째도 디자인이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푸조의 디자인은 언제나 진보적이었다. 근래 들어서는 과감하면서도 누구에게나 매력적인 디자인을 전 라인업에 걸쳐 선보였다. 과거의 푸조가 고양이를 닮은 ‘펠린 룩’으로 여성적인 분위기를 풍겼다면, 최신 푸조는 굵은 선과 강렬한 눈매로 남성적인 분위기를 담았다.

508은 평범한 중형 세단의 비례였던 1세대와 달리 전장을 줄이고 전고를 낮춰 4도어 쿠페의 비례감을 갖췄다. 전장은 1세대보다 80mm나 줄어든 4750mm에 그친다. 길이로만 보면 아반떼(4620mm)와 쏘나타(4900mm)의 딱 중간 즈음이다. 루프를 얇게 만들어 더 멋진 라인을 그려내기 위해 프레임리스 도어까지 적용했다.

덕분에 길 위에서 508의 존재감은 단연 돋보인다. 멀리서 달려오는 모습은 세단보단 쿠페에 가깝다. 시승차는 시그니처 컬러인 ‘얼티밋 레드’ 색상으로 더 눈에 띄었다. 흔치 않은 브랜드의 4도어 쿠페형 세단, 게다가 빨간색이기까지 하니 번화가에서는 시선이 느껴질 정도다.

근사한 외모는 ‘물오른’ 실내 디자인으로도 이어진다. 낮은 차체 안에 켜켜이 쌓아 올린 대쉬보드는 가로선이 돋보여 실내가 넓어 보이는 착시를 준다. 작은 운전대와 그 너머의 계기판으로 구성된 아이콕핏, 자연스럽게 센터 터널에 손을 올리면 닿는 전자식 변속 레버의 위치도 마음에 든다.

센터페시아 구성은 SUV인 3008, 5008과는 조금 다르다. 디스플레이가 대쉬보드 위에 올려진 SUV들과 달리 508은 송풍구를 위로 올리고 디스플레이의 높이를 낮췄다. 그 밑에는 토글식 버튼으로 주요 메뉴를 선택할 수 있게 하고, 자주 쓰는 몇 가지 기능은 터치식 버튼으로 배열했다.

디스플레이가 손과 가깝다는 건 장점이지만, 카플레이 등을 통해 내비게이션 화면을 띄웠을 때는 전방과 디스플레이 간의 시선 이동거리가 제법 길었다. 또 자체 내비게이션이 내장된 유럽에서는 10인치 와이드 디스플레이가 적용되는 반면, 국내에서는 비좁은 8인치 디스플레이가 적용된 것도 흠이다. 화면 양 옆의 드넓은(?) 베젤이 민망할 정도다.

도톰한 버킷형 시트가 운전석 쪽으로 기울어진 대쉬보드와 불쑥 솟아오른 센터 콘솔에 둘러싸여 흡사 비행기 조종석에 앉는 느낌이다. 쿠페 기분을 한껏 내라는 배려다. 하지만 쿠페 스타일에 장점만 있는 건 아니다. 뒷좌석은 성인이 오래 타기엔 썩 유쾌하지 않을 정도로 헤드룸이 좁다. 트렁크 역시 개구부 확보를 위해 패스트백 형태의 테일게이트가 적용됐지만, 플로어가 너무 높아 생각보다 적재능력은 좋지 않다. 멋쟁이라면 동승자들로부터의 원성은 감수해야 한다.

사뿐하고도 치명적인 퍼포먼스

508GT의 심장은 2.0 BlueHDi디젤 엔진이다. 최고출력은 177마력, 최대토크는 40.8kgf.m으로 타사의 2ℓ급 디젤 엔진들과 큰 차이 없는 성능이다. 변속기는 아이신제 8단 토크컨버터 자동변속기가 조합된다. 파워트레인의 궁합은 좋은 편이다. 묵직한 토크 덕에 가속감이 경쾌하고, 변속기 역시 변속충격은 적으면서 부지런히 동력을 잘 전달해준다.

1.5 디젤 모델에 비하자면 2.0디젤 엔진은 고속 주행 시의 여유가 돋보인다. 추월 가속 시 힘을 쥐어짜야 하는 1.5와 달리, 고속 주행 중에도 항상 힘이 넉넉히 남는 느낌이다. 다만 2.0 엔진은 최대토크가 2000rpm부터 뿜어져 나오는데, 그 아래의 회전영역-이른바 실용 영역에서는 터보 래그가 다소 심하게 느껴져 급가속 시에는 답답하다.

디젤차임에도 엔진 사운드가 묵직하게 들리는 점은 매력적이지만, 1.5ℓ 모델에 비해 아이들링 진동이 큰 것도 아쉽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시내 주행이 잦다면 기초대사량이 작고 반응성이 좋은 1.5를, 고속 주행이 잦다면 힘이 넉넉한 2.0을 구입하는 것이 좋겠다.

재미있는 건 고루하다고 생각하기 쉬운 디젤 세단임에도, 정작 스포츠 주행 시의 만족도가 훨씬 높다는 점이다. 특히 서스펜션의 세팅이 매우 절묘한데, 일상적인 주행에서는 요철을 부드럽게 받아내면서도, 마음먹고 코너를 공략하면 노면을 놓치지 않는다. 푸조 특유의 쫀득한 하체 질감을 가장 공들여 조율하면 이런 느낌일까? 여기에 고성능 타이어인 미쉐린 파일럿 스포츠4가 순정으로 장착돼 산길을 내달리는 것이 퍽 재미있다. 평소에는 사뿐사뿐 걷다가 먹잇감을 노릴 때는 날렵하게 뛰어드는 고양이과 맹수와도 같다.

선택의 폭이 좁은 건 아쉬워

국내에 판매 중인 508 라인업은 총 4종류다. 1.5ℓ 디젤은 알뤼르 트림만 판매되며, 2.0ℓ 디젤에는 알뤼르, GT라인, GT 등 세 가지 트림이 갖춰졌다. 1세대 508이 1.6 디젤 위주로 판매되던 것과 달리, 2세대는 2.0 디젤 중심으로 판매하겠다는 전략이다. 하지만 보다 효율적이고 실용 영역의 민첩성이 좋은 1.5 디젤은 2.0 디젤의 하위 모델이라기보단 성격이 상이한 엔진이다. 그런 1.5 디젤에서 GT라인과 같은 상위 트림이 갖춰지지 않은 건 아쉬운 대목이다.

또 한 가지, 푸조의 디젤 엔진 기술은 세계적인 수준으로 까다로운 WLTP 인증도 단숨에 통과했다. 하지만 SCR과 같은 고가의 후처리 장비가 탑재되면서 차량 가격이 오른 것도 사실이다. 더구나 국내 시장에서도 미세먼지 이슈로 디젤차의 입지가 점점 좁아지는 상황에서 가솔린 엔진이 탑재된 모델이 없는 것은 508의 약점이다. 효율과 퍼포먼스의 이점이 있는 가솔린 모델과 유럽에서 출시 예정인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모델이 국내에 도입된다면 선택의 폭이 넓어질 것이다.

‘패밀리 카’ 대신 ‘헤일로 카’ 선택한 세단

중형 세단을 바라보는 시선은 일반적으로 ‘패밀리 카’의 기준에 맞춰져 있다. 뒷좌석은 얼마나 편한지, 트렁크에는 짐이 얼마나 실리는지, 승차감과 정숙성이 얼마나 뛰어난지 등등이다. 하지만 SUV와 크로스오버가 대안으로 자리잡은 상황에서, 패밀리 카로서의 중형 세단이 설득력을 얻기란 결코 쉽지 않다.

508은 이처럼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세련된 스타일과 경쾌한 퍼포먼스를 갖추고 더 이상 패밀리 카가 아닌, 브랜드의 아이덴티티를 주도하는 ‘헤일로 카(halo car)’의 면모를 보여준다. 서두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세단들이 생존 경쟁을 벌이는 상황에서, 푸조의 이런 실험이 성공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중형 세단은 넓고 편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벗어나 ‘중형 세단도 스타일리시할 수 있다’는 발상의 전환을 이뤄낸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비록 좀 좁고 불편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몸집 큰 SUV가 범람하는 시대에 군살 없이 탄탄한 근육질 몸매와 매혹적인 눈빛을 지닌 508은 현실에 타협하지 않는 이단아적 세단이다. 평범한 패밀리 카가 필요하다면 SUV나 다른 브랜드의 차를 알아보는 것이 좋다. 하지만 무채색 도로 위에서 나만의 색깔을 오롯이 드러낼 수 있는, 멋스러운 4도어 쿠페가 필요하다면 508은 대체할 수 없는 선택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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