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르장머리도 못 고치고 '호갱'이 됐습니다

  • 입력 2015.12.09 09:41
  • 수정 2015.12.09 16:56
  • 기자명 김흥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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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관련 기사에 붙는 여러 댓글 가운데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말이 ‘호갱(님)’이다. 인터넷 시대에 자연스럽게 생긴 신조어로 알았는데 국어사전에도 뜻이 설명되고 있다. 호구와 같은 의미의 호갱은 “어수룩하여 이용하기 좋은 손님”, 쉽게 말하면 갖고 놀기 좋거나 속여 먹기 좋은 사람이다. 당하는 사람, 소비자 입장에서는 낚인 것으로 보면 된다.

일 없이 당하지 않고도 호갱이 되기는 쉽다. 현대차나 기아차를 옹호하거나 샀다고 하면 바로 호갱이 된다. 기사의 경우 앞뒤를 살펴볼 필요도 없고 내용과도 무관하게 “왜 우리를 호갱으로 보느냐”는 식의 댓글이 달린다. 그런데 기분이 좋을 수 없는 호갱이 되기를 우리 스스로 자처하고 낚이는 일이 생겼다. 폭스바겐 얘기다. 배출가스 조작 사실이 드러나면서 분노했던 소비자들이 이 부도덕한 기업의 버르장머리를 어느 정도 고쳐 줄 것으로 생각했는데 현실은 영 딴판이 됐다.

폭스바겐은 지난달 우리나라에서 사상 최다 판매 기록을 세웠다. 전달보다 377%, 지난해 같은 달보다 65.6% 판매가 늘었다. 디젤차 점유율도 73.3%로 껑충 뛰었다. 세계가 놀랄 일이다. 같은 기간 미국에서 폭스바겐의 판매는 25% 줄었다. 판매 감소로 딜러들이 먹고 살 수가 없게 됐다며 아우성을 치고 있고 유럽과 중국 모두 10% 이상 감소했다. 우리나라와 같이 대규모 할인 공세를 펼쳤지만 엄중한 그 나라 국민에게는 통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소비자를 기만하고 속인 기업의 제품을 단죄하기는커녕 “싸게 팔 때 사자”는 분위기에 역설적으로 사상 최대의 실적으로 부도덕한 기업의 기를 살려 준 꼴이 됐다. 스스로 호갱이 된 것이다. 호갱이 되고 안되고는 별개로 치자. 폭스바겐의 11월 할인 공세는 더 치졸한 일로 지적을 받아 마땅하다. 해외에서는 굿윌 보상 패키지라는 명분으로 문제가 된 차량 구매자들에게 수백만 원대의 보상을 해 주면서 국내에서는 3000명이 넘는 소비자들이 소송을 제기해도 꼼짝도 하지 않고 있다.

폭스바겐은 지난달, 60개월 무이자 할부에 많게는 1800만 원이나 되는 대대적인 할인 공세를 펼쳤다. 이 덕분에 4500대를 팔았으니까 할인과 금융비용으로 대 당 평균 1000만 원을 썼다고 가정해 단순 계산을 해도 450억 원을 쏟아 부은 셈이다. 문제가 된 EA189 엔진을 장착한 폭스바겐의 국내 판매 차량은 12만 5000대, 돈으로 해결할 문제는 아니지만, 소송을 제기한 3000명의 마음을 달래 줄 충분한 액수고 차주 1인당 36만 원씩 보상을 해 줘도 되는 엄청난 금액이다.

그런데도 기존에 차를 구매하고 사기를 당한 피해자들의 보상은 외면하고 막대한 손실을 감수하며 신규 고객을 끌어 들이기 위해 팔기에만 급급했다. 많이 팔려 나간 차들은 폭스바겐 코리아의 미래 먹거리가 된다. 워런티와 고장 수리 등으로 벌어 들이는 수입이 만만치 않고 대부분의 자동차 회사들은 이런 점까지 계산에 넣고 프로모션을 하고 차를 판다. 

이런 얄팍한 계산에 12만 5000명의 고객을 호갱으로 만들어 버린 셈이다. 그런데도 싸구려 떨이가 나왔다고 호갱님들은 줄을 섰고 폭스바겐은 이제 재고도 없다 한다. 판매 중지 대상인 차들을 미리 사들였고 이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 중이라고 한다. 하지만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아직도 호갱은 존재하고 있고 정부도 적당한 선에서 빨리 마무리를 짓고 싶은 눈치니까 말이다.

자신들의 치부를 은폐했다가 댓가를 치른 사례는 해외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미쓰비시는 2000년 차량 결함을 은폐했다가 내부 고발자의 폭로로 그 해 상반기에만 756억엔의 적자를 기록하고 도산 위기에 몰리면서 결국 2류 브랜드로 전락했다. 

포드와 파이어스톤 타이어, 지엠(GM)의 시동키, 도요타의 의도하지 않은 가속 등 의도적으로 결함을 숨겼다가 엄청난 손실을 입고 이를 만회하고 소비자들의 신뢰를 다시 회복하는데 수 년이 걸린 자동차 회사들도 있다. 특정 기업에 대한 악 감정은 없다. 그러나, 돈 앞에 굴복해 우리 스스로 호갱이 되고 부도덕한 행위가 자명한 기업의 버르장머리를 소비자들이 고쳐주지 않는다면 또 다른 폭스바겐은 계속해서 나올 수도, 어쩌면 지금까지 그렇게 당하고 살아 온 것은 아닌지 되 짚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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