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터쇼의 꽃으로 불리지만 콘셉트카는 난해하다. 생김새는 물론이고 적용될 것이라는 첨단 기술의 실현 가능성까지 해석이 쉽지 않다. 콘셉트카는 판매보다 완성차 메이커의 실력을 과시하기 위해 만들어진다. 디자인은 물론, 기술의 한계도 콘셉트카에는 없다. 그래서 더 기괴하고 파격적인 콘셉트카가 모터쇼에는 경쟁적으로 등장한다. 소비자가 어떤 트랜드에 관심을 갖는지, 여기에 맞춰 신차 개발 전략을 세울 수 있다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1897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모터쇼'가 세계 최초로 열린 이후 지금까지 콘셉트카가 '모
GM이 전기차 EV1을 양산해 시판한 뒤 다시 회수해 폐기한 데 자극을 받은 엔지니어 마틴 에버하드(Martin Eberhard)와 마크 타페닝(Marc Tarpenning)은 전기가 지구 온난화를 억제할 수 있는 최적의 미래 자동차 동력원으로 확신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2003년 7월에 테슬라 모터스(Tesla Motors)라는 이름의 회사를 만들고 본격적으로 전기차 개발을 시작했다.환경보호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커지고 있던 시기여서, 실리콘 밸리에서 사업을 키운 두 사람이 자동차를 만든다고 하자 대중의 관심이 쏠렸다. 2004
레바논 출신의 미국계 사업가 니콜라스 하이엑(Nicolas Hayek)은 1983년, 캐주얼한 시계 브랜드 스와치(Swatch)를 만들어 큰 성공을 거뒀다. 그는 스와치의 성공에 밑거름이 된 생산 및 개인화 전략을 현대적 도시형 소형차 생산에도 반영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중세 시대부터 이어진 구도심과 현대적 신도시가 뒤섞인 유럽 주요 도시의 교통환경에 어울리는 새로운 개념의 도시형 차에 대한 요구가 커지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는 스와치처럼 단순하면서 사용자의 개성을 반영할 수 있는 친환경 초소형 차를 구상했다. 초기에 그의 아이
1980년대 후반, 포뮬러 원(F1)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두고 있던 맥라렌 팀은 1988년에 아이르턴 세나(Ayrton Senna)와 알랭 프로스트(Alain Prost)라는 걸출한 드라이버와 MP4/4 경주차의 탁월한 성능에 힘입어 시즌 16차례의 그랑프리 중 15번 우승을 차지하며 정점에 이른다. 이에 고무된 맥라렌 경영진은 F1에서의 성과를 바탕으로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성능을 내는 일반 도로용 차를 개발하기로 결정한다.1970년에 세상을 떠난 팀 설립자 브루스 맥라렌(Bruce McLaren)이 계획했던 미완의 스포츠카 M6
성공한 기업가 페루치오 람보르기니(Ferruccio Lamborghini)가 자신의 이름을 내건 자동차 회사를 세운 것은 1963년의 일이다. 자동차 애호가였던 람보르기니는 페라리를 포함해 이미 스포츠카 시장에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브랜드와 경쟁할 수 있는 차를 직접 만들 생각이었다. 당시 명망있던 스포츠카 회사들은 대부분 모터스포츠에 출전하면서 경주차 기술과 설계를 바탕으로 일반 도로용 스포츠카를 만들어 팔았다.그런 차들이 운전 편의성과 호화로움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람보르기니는 순수하게 일반 도로 주행에 초점을 맞춘 고급 스포츠
혼다가 시판한 첫 자동차는 1963년 8월에 나온 T360 경 트럭이었다. T360도 기술적으로 흥미로운 점이 많지만, 두 달 뒤에 판매를 시작한 S500은 그 이상으로 큰 의미가 있다. 창업자 혼다 소이치로(本田宗一郎) 의지가 직접 반영되었고, 당시까지 혼다가 쌓은 모터사이클 경험을 바탕으로 이후로 나올 자동차들의 성격과 이미지를 규정한 모델이기 때문이다.혼다가 자동차 개발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1958년 9월, 혼다 시로코(白子) 공장에 있었던 기술연구소에 자동차 개발을 맡을 제3연구과가 만들어지면서 부터다. 이곳에서는 국민
일본 통상산업성(현재의 경제산업성)이 1955년 '국민차 구상'을 발표한 뒤로, 일본 자동차 업체는 대부분 경차나 국민차 규격에 가까운 소형차 개발에 나섰다. 특히 1958년 후지중공업이 내놓은 스바루 360이 시장에 안착하면서 경차 개발에 뛰어드는 업체가 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도요(東洋)공업으로, 지금의 마즈다주식회사다.도요공업은 1931년부터 모터사이클과 트럭의 중간 형태인 오토삼륜을 생산해 시장에서 높은 인지도와 신뢰도를 갖고 있었다. 일반 소비자에게 자동차가 고가의 사치품이던 시절에는 상대적으로 값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일본은 한국전쟁 특수 덕분에 경제가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이에 일본 정부는 군수품 생산에 주력했던 일본의 기계공업을 민간 시장을 위한 제품 생산으로 전환하고, 국민들이 전후 부흥과 경제성장을 실감할 수 있도록 자동차 보급을 확대하는 발판을 마련한다. 그것이 1955년에 발표된 이른바 '국민차 구상'이었다.1954년에 개정된 일본 도로교통관리법에 따른 경차 규격(차체 길이 3m, 너비 1.3m, 높이 2.0m 이내, 엔진 배기량 360cc 이하)과 더불어 일본 통상산업성(현재의 경제산업성)은
사브는 스웨덴 항공기 회사(Svenska Aeroplan Aktiebolaget)의 머리글자를 딴 회사 이름에서 알 수 있듯, 1937년 항공기 제작회사로 역사를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군용기를 생산했던 사브는 전쟁이 끝나자 새로운 사업 분야로 서둘러 진출해야 했다. 그래서 1945년에 자동차 설계 프로젝트를 처음으로 시작했다. 프로젝트는 회사 내에서 '92'로 불렸다. 앞서 진행한 항공기 프로젝트의 이름이 91이었기 때문에, 다음 숫자인 92가 쓰인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자동차 개발과 생산 경험이 없었던
제2차 세계대전의 포화를 피해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오스트리아 그뮌트(Gmünd)로 근거지를 옮긴 포르쉐의 설계 회사는 자동차를 독자 생산하기로 결정한다. 페리(Ferry)라는 애칭으로 더 잘 알려진 창업자 페르디난트 포르쉐(Ferdinand Porsche)의 아들, 페르디난트 안톤 에른스트 포르쉐(Ferdinand Anton Ernst Porsche)의 결정이었다.'사고 싶은 차가 없어서 직접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아버지가 전범 혐의로 투옥되어 있는 상황에서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고급차를 주로 만들었던 영국 로버는 전쟁이 끝나자 위기를 맞았다. 전쟁 중 군수품 생산으로 전환해 공장과 노동자는 충분했지만, 막상 전후 대중차와 상용차 수요에는 빠르게 대응할 수 없었다. 게다가 영국이 겪고 있던 철강 공급난으로 일반적인 차는 만들 수 없는 상황이었다. 로버는 새차를 내놓을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철강 공급 정상화가 이루어질 때까지 공백기를 메울 방법을 찾아야 했다.이 위기는 로버의 경영을 맡고 있던 스펜서 윌크스(Spencer Wilks)의 발등에 떨어진 불이었다. 그 불을 끌 실
엔초 페라리(Enzo Ferrari)는 1920년대부터 이탈리아 알파 로메오(Alfa Romeo)와 오랫동안 관계를 맺고 자동차 경주 팀을 이끌며 명성을 쌓았다. 그러던 1939년에 알파 로메오와 결별하고 자신이 직접 경주차를 만들어 출전하기 위해 회사를 차린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계획은 미뤄졌고, 전쟁이 끝날 무렵부터 다시 자동차 개발에 나선 그는 1947년에 마라넬로(Maranello)에 새로운 둥지를 틀고 회사 이름을 자신의 성을 따 페라리로 바꿨다.페라리의 첫 차는 알파 로메오와의 결별 직후 설립한 아우토아비오 코스트루치오